에쎄이

[이야기] 진흙더미

빅토리기쁜맘 2013. 5. 30. 15:01

 

시간도 장소도 알 수 없는 어떤 공간에

진흙더미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있었다.

아무런 감각도 자각도 없는 무생물체인 진흙더미에게 어떤 이유에선지

'마음'이란 것이 생겨났다.

그 마음은 암흑과 무음의 세계에서 엄청난 공허감을 느꼈고

필사적으로 그 공허감을 떨쳐버리고 싶어했다.

 

그때, 흑암의 공허감을 가르고 빛이 다가왔다.

진흙더미에게 감각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따스한 빛이 공허감을 물리치고,

부드러운 바람이 진흙더미를 어루만졌다.

숲의 향기가 진흙더미의 숨을 따라 몸으로 들어왔다.

그 황홀한 생명의 호흡과 함께

진흙더미는 눈을 떠 세상을 바라보았다.

 

지평선 위로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시시각각 빛깔이 변화하며

숲이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진흙더미가 있는 곳은 넓은 평원 한 가운데 솟아 있는 산등성이였다.)

부산한 새들이 숲의 정적을 깨고,

부드러운 미풍에 풀잎들은 몸을 흔들며 이슬을 털어냈다.

습기 머금은 축축한 땅의 냄새는 처음 맡는 것임에도

진흙더미에게 고향을 느끼게 하는 아련한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진흙더미는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냄새맡고 모든 것을 듣고자 했다.

그 모두가 경이였고, 놀라운 아름다움이었다.

 

어느 순간 자애로운 목소리가 그에게 물었다.

그 존재를 몰랐지만,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진흙더미는

그 목소리가 처음부터 그 순간까지 내내 그의 곁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네 보기에도 아름다우냐?"

진흙더미는 목소리를 향해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나는 누구이며 당신은 누구십니까?"

"너는 진흙더미요, 나는 이 모든 것을 만든 자니라.

내가 너에게 잠시 마음을 주어,이 세상을 나처럼 볼 수 있게 했다.

이제 네게 허락된 하루가 지나면 원래의 마음이 없는 진흙더미로 돌아갈 것이니

마음껏 세상을 구경하도록 해라."

"오오 모든 걸 만드신 분이시여, 잠시만 기다려주소서.

이렇게 좋은 것을 보고 느낀 후에

공허뿐인 무감각한 존재로 돌아간다면, 제가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걱정하지 말아라. 너는 마음이 없어지니 모든 기억도 없을 것이요

공허도 없을 것이라."

진흙더미는 아름다운 꽃이 흔들리는 사이로 날아다니는 나비를 보았다.

하늘 높이 우지지는 새들, 푸르른 하늘과 구름을 바라보았다.

서산으로 해가 기울어가며 만드는 노을의 장엄함이 사무치게 안타깝게 느껴졌다.

이 모든 것을 다시 느낄 수 없다는 생각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저를 조금만 더 세상을 볼 수 있도록 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하루는 세상을 다 보기에 너무 짧습니다."

"......." 목소리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지금 진흙더미로 돌아가면 그저 하루해가 져서 잠이 드는 것처럼 원래대로 돌아갈테지만,

네가 더 많은 것을 보려 하면 고통과 슬픔도 보게 되리라. 때로는 그 고통이 너를 삼킬 수도 있으리라."

목소리가 끝나자 그의 눈 앞에는 뱀에게 새끼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사투를 벌이는 어미새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끝내 뱀은 아기새를 삼키고 그 자리를 유유히 떠났다.

그 광경에 가슴이 아팠지만, 진흙더미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아니오! 그렇다한들, 생명의 기쁨을 당하겠습니까.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에 비하겠습니까.

어차피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면 고통도 슬픔도 끝이 있을 것인즉, 저는 생명을 바라옵니다."

 

진흙더미의 결심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간구가 나를 움직여 너에게 00년의 삶을 허락하겠다.

육체가 해체되는 죽음의 고통이 있을 것이요, 많은 이별을 겪어야 하리라.

하지만, 너에게 선물을 주겠으니..그것은 결핍이라.

그것은 배고픔을 느껴 네가 먹어야 할 때를 잊지 않게 하고

졸림을 느껴 네가 잘 때를 잊지 않게 함으로 너를 보살피리라.

또 네가 일을 하여 시장한 네 배를 채울 수 있도록 하겠고,

태어날 때는 부모를, 커서는 짝이나 친구를 만나 네 외로움을 덜 수 있게 하겠다.

 

또 남을 사랑하고 도울 수 있는 힘을 네게 줌으로써

내가 만든 세상이 진정 아름다움을 네가 증거하게 하겠다.

나의 일에 참여하게 하겠다.

또 내 일에 참여한 너를 내가 버리지 않을 것이니,

내가 언제나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그러나

오늘의 해가 지면, 나와 너 사이에 있었던 이 모든 대화를 네가 잊고

삶을 시작하게 될터인데.. 

네가 이 결정을 후회하게 될지, 아니면 내게 감사하게 될지는

네가 어떤 삶을 사느냐에 달려 있다."

 

"아, 감사합니다. 제가 후회할 리 없습니다.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해는 완전히 지고...

다음날, 어느 집에서 아기가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