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서에 보면 유태인들이 하나님의 전에서 드리는 제사 중에
화목제라고 하는 것이 있다.
자세한 뜻은 모르지만.. 말 그대로 생각해보면 하나님와 나와의 불화를 청산하는 제사가 아닐까 싶다.
많은 암환자들이 혹은 그 가족들이 신을 원망하곤 한다.
착하게 살아 왔는데.. 열심히 살아 왔는데.. 왜 내게 혹은 내 부모님에게 이런 암을 주었는지
신이 있다면.. 그 신을 원망하고 저주하고 싶단 말을 한다.
그런가하면 어떤 이들은 믿음을 대체보완요법 중의 하나쯤으로 생각한다.
신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투병에 도움을 줄 거란 생각이다.
그게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런 경우 대체로.. 그 신이 내게 더 이상의 삶을 허락하지 않을 수도 있단 생각은 하지 않는다.
애초부터 신의 존재를 절대적으로 믿지 않기 때문일 거다.
나는 암에 걸리기 전, 하나님과 불화햇었다.
신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인 <잠자는 신>, 혹은 <숨은 신>이었다. 응답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하는 신이었다.
그런 신은 무능력하던가 우리 인간과는 너무나 코드가 달라서 우리의 아픔을 아픔으로 느끼지 못하는 신.
비유가 걸맞는지 모르겠지만.. 대의를 위해 자식을 기꺼이 희생시키는 잔인한 어버이와 비슷한 신이었다.
차라리 신이 없다면.. 죄책감도 덜어질 것이고.. 고단한 삶에 더 많은 위안거리들을 자유롭게 개발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기독교의 신앙은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된다고들 하는데..
나는 내가 정죄받아 마땅한 죄인이라는 생각은 커녕..
인간세상의 폭력과 비참함과 잔인함 앞에서, 신음하고 압박받는 자들을 돕지 않고 내버려 놔두는 하나님을 정죄하고픈 기분이었다.
그런 불화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는 데로까지 나아갔다.
하나님은 나와 별 상관없는 존재, 습관의 잔재 속에 이따금 떠올려지는 이름일 뿐이었다.
- 계속 -
그렇다면 내게 교회는 어떤 곳이었는가.
크리스마스 동극의 한 장면.. 여름 성경학교.. 한복을 입고 '고요한 밤 거룩한 밤'에 맞춰 춤을 췄던 일..
내 유년의 추억들이야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것이지만...
내 기억 속의 교회.. 목사는.. 별로 존경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내가 장위동으로 이사가서(국민학교 3학년) 다녔던 교회를 개척한 목사님은 열정적인 설교로 교회를 부흥시킨 젊은 분이었다.
문제는 교회가 커지면서 생겨났다.
젊은 집사, 장로들과 재정 문제로 인해 크게 시비가 생겨서
마침내는 주일날 목사님에게 똥물세례를 끼얹는 사건이 일어났다.
더 놀라웠던 것은 목사님이 똥물을 닦지 않고 그 자리 그대로 사진사를 불러 사진촬영을 해서
고소자료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결국 목사님은 목사님을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교회를 나가서 새로 교회를 만드셨고
기존교회에 남은 신도들은 새로 나이 드신 목사님을 모셔왔는데
이 분은 새벽예배를 참석하기에는 너무 잠이 많은 늙은 목사님이셨다.
열정은 부족하나 튀지 않고 둥글둥글 일을 처리하는 분이라는 중평이었다.
그리고 모든 권력은 하나님에게로부터 온다는 성경귀절을 의지해서
당시 박정희 정권 그리고 뒤이은 전두환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세력들을 마귀의 세력으로 설교하였다.
잘 모르겟지만, 보수적인 예수교장로교 목사님으로서는 일반적인 설교가 아니었나 싶다.
79학번인 내가 대학을 다닌 시절은 긴급조치의 살얼음(79년 1학기), 부마사태, 12.12 사태,
민주화의 봄, 광주사태로 연이어진 격변의 시기였다.
한편으로는 오랜 독재에 맞서 학생운동의 정치적 위상이 어느 때보다 강조되었고, 학생운동의 한계를 넘어서는
이념적인 고민이 본격화되던 시기였다.
같이 재수를 했던 미선이의 인도로 인문대 학보 편집실에 들어가 사회과학공부를 하던 나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유와 평등을 강조하는 사회주의적 정치성향을 가지게 되었고 소시민적 삶을 넘어선 삶을
갈구하였다. (맏딸인 내게 기대고 싶어하는 가난한 홀어머니의 마음과는 너무 다른 삶이었다.)
할머니쪽으로 3대조가 절두산에서 목이 잘린 순교자시고 대대로 기독교를 믿어온 집안에서 자랐지만
대학에 들어가면서 예장파였던 교회가 너무 견딜 수 없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대학부 청년들도 내가 보기엔 너무 소극적이고 온실속의 화초같이 자기밖에 모르는 나약한 존재들이었다.
목사님은 구태의연한 꼴보수로 집권층의 이해를 대변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종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별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지나치리만큼 집권층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것처럼 보였다.
국회의원 선거철이 되면 여당(아주 이따금은 야당) 국회의원 후보가 교회에 찾아왔고
목사님은 예배시간에 그 후보의 경력이며 홍보가 될만한 이야기로 소개를 하며 교인들에게 박수를 치게 했다.
교회에 발길을 끊게 된 것은 너무 자연스러웠다.
한 마디로, 교회가 싫었다. 심지어 교회를 나간다는 게 부끄럽게 느껴졌다. 나의 비합리성의 증거같이 느껴졌다.
하나님을 믿더라도 교회를 나가지 않으면서 믿는 게 나을 거 같았다.
가슴아픈 에피소드를 소개하자면,
어머니는 내가 학생운동으로 구속된 직후에 교회 목사님이 설교 중에
"모든 권력을 하나님에게로부터 오는 것인데.. 어린 학생들이 정부를 비판하여 데모를 하는 것은
불순종과 교만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자신의 교만함을 회개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시는 걸 듣고
그 교회에 발길을 끊으셨다.
목사님도 온교인도 내가 데모를 했다는 것을 다 알고 있는 터였기 때문에
그 날의 설교는 위로가 절실했던 어머니로서는 감당하기 정말 힘드셨을 것이다.
(그 이후 어머니는 10년 넘게 정들었던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를 나가셨다)
젊은 시절의 팽팽했던 자신감이 마치 풍선에 바람 빠지듯이 빠져나가고
지치고 지쳤던 내 삶의 길목 길목에서 교회가 나를 부른 적이 있었다.
동생 미0이가 내 곁에 살면서 다녔던 광명시의 어떤 개척교회.
동생이 다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우리 옆집에 참 괜찮은 아줌마가 그 교회 신자였다.
난 살면서 그렇게 선한 사람을 본 적이 없는 거 같았다.
(이야기가 길어서 생략)
예수님이 그 사람을 변화시켰다는 걸,
그 사람 안에 예수님이 있다는 걸.. 나도 알아볼 수가 있었다.
본받겠다는 생각보다는.. 끌리듯이 그래서 그 교회를 출석했고
마침 반주자가 없어서 내가 위의 애를 업은 채로 주일마다 반주를 하곤 했었다.
그런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교회가 일산 신도시 개발붐을 타고
고층 아파트 촌으로 이사를 가면서 교인들을 일산까지 실어나르는 셔틀버스를 운행했는데
나는 멀미가 심한 지라 일산까지 따라다닐 수는 없었다.
그 교회가 있던 자리에는 교회 이름만 바뀐 새로운 교회가 들어섰다.
나는 이 교회를 그냥 다니려고 하다가, 너무 흥이 안나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런데 알고보니.. 먼저 있던 내가 다니던 교회 목사님은 새로 온 목사님에게
교인들이 있는 교회를 넘기는 식으로 해서 돈(프리미엄)을 챙겨 받으셨다고 한다.
이게 관례인지는 몰라도...자본주의 자영업자들의 상거래와 다름없는 거래란 생각에
한동안 꽤 씁슬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일산 신도시로 간 목사님은 워낙 설교가 달변에 열정적이시라
그곳에서 많은 교인을 얻으셨고 아주 큰 교회로 급격히 성장했다고 들었다.)
-계속-
이렇게 신으로부터 멀어지고 교회로부터 멀어진 것이 먼저인지
삶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된 게 먼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게 삶은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그런 것으로 여겨졌다.
중2때 아버지가 뇌일혈로 돌아가시고, 내 나이 31살 때 어머니가 비명에 돌아가신 경험,
그리고 유독 어릴 때부터 사람들의 가슴 아픈 인생살이를 보고 괴로와했던 내 성향은
삶을 기뻐하고 축복으로 여기기가 어려웠다.
아이 둘을 낳고서도 늘 아이들에게 미안하게도
내가 어쩌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것일까. 이렇게 폭력과 비정함과 잔인함이 날뛰는 세계에..
하는 낭패감과 죄책감을 씻을 수가 없었다.
인생은 평안한 풀밭같이 보이는 곳에도 복병을 숨겨두어 갑자기 꺼져버리는 땅 같은 것이었다.
인생의 어느 시기에 <크레바스>라는 단어를 처음 듣게 되었는지 모르겠는데..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나는 내가 인생에 대해 느껴오던 것이 그 한 단어에 응축되어 있단 생각이 들었다.
빙하의 갈라진 틈(크레바스)은 쌓이는 눈으로 인해 평지와 구별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하얀 빙원이라 생각하고 한 발 한 발을 내딛지만, 누가 어디서 천길 깊이의 크레바스에 빠져
천길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것인가는 아무도 모른다.
더러는 병으로 더러는 인간의 잔인함과 무지와 폭력으로 더러는 사고나 재해로.. 그 크레바스에 걸리면 용을 빼는 재주가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오늘을 즐기라고 말한다. 아마도 그것이 최선일 것이다. 철저히 무력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나 이 세계를 살아가라고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잔혹동화 같은 이야기다.
태어났으니 살고는 있으나, 다시 태어나고 싶지는 않은 세계였다.
이런 무력감에 빠진 나는 내 삶에 대해 아무런 비젼도 없었고 꿈도 없었다.
남들처럼 전세를 떠나 집을 사는 것에도 관심이 없었고, 아이들을 공부 열심히 시켜 좋은 대학을 보내는 것에도 관심이 없었고,
어떤 일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지 못한 채로
내 인생은 둥둥 흘러갔다.
이따금 나를 엄습하는 두려움은 이것이었다.
빠삐용이 자신의 죄를 인정한 것과 같은 질문. 인생을 낭비한 죄.
"죽을 때.. 살아온 내 삶을 후회하면 어떡하지?"
그러나 내게 대안은 없어보였다.
-계속-
내 30,40대가 무력감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건 아니다.
큰애를 낳았을 때 느꼈던 살아오며 이룬 것중 가장 큰 일을 해냈다는 뿌듯함의 기억이라던가,
청계동에 살 적에 주인집에서 내 몫으로 심어준 세 구덩이의 호박밭에서 호박이 자라는 걸 볼 때의 기쁨과
며칠만 더 있다 따야겠다고 아침 저녁으로 호박 커가는 걸 흐뭇하게 바라보는데
누군지도 알 수 없는 행인이 따가버렸을 적의 분노.
두문불출하는 나를 찾아 시골로 찾아와준 친구들이 엄청 밀려있는 집안청소를 싹 해놓고 갈 적의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마움,
같은 또래 주부 00를 알게 되어 밤을 새워 술을 마시며 '이야기'가 우리를 구제해줄 수 있을 것만 같이 느껴지던 시간들,
이런저런 시간을 보내면서
내 삶을 후회하지 않을 만큼의 대안은 없었지만,
나는 작은 것들.. 호박을 가꾸고 호박을 따고 호박을 지키며 호박을 나눠주고 호박으로 요리하며.. 로
내 삶을 반짝이게 만들 수는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되도록 괴롭고 슬픈 것들을 보지 말 것. 즐거움과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자리를 놓치지 말 것.
재미있는 사람, 밝은 사람 주위에는 사람들이 모이지만 우울하고 슬픈 사람 주위에는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았다.
그래서 나는 재미있는 사람이 되려고 애썼고, 재미있는 사람인 척햇다. 그리고 아마 재미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보람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생각을 안했다.
분명히 보람 있는 삶이란 것도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자원봉사라던가, 기타 등등.. 재미가 없어서 지속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고보면 내가 두려워한 '죽을 때 할지 모르는 삶의 후회'는..
타인과의 관계 문제가 아닌,
'내가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는 내 삶'이 무엇인가의 문제였다.
재미가 없다면 만족할 리도 없었다. 그러니 보람을 내세워 나를 움직일 수는 없었다.
티비에서 아픈 아이들 이야기가 나오면 채널을 돌렸다. 암환자 이야기가 나오면 채널을 돌렸다.
뉴스보다가 재해를 입거나 범죄 피해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채널을 돌렸다.
안정적인 중산층 주부인 내 인생에서.. 내 기본의무라고 생각된 아이들 문제가 아닌 한,
외부로부터 오는 슬픈 시간, 괴로운 시간을 줄이고 싶었다. 그건 아주 강렬한 바람이었다.
그래서 암에 걸려 입원할 때 나는 속으로 탄식했다.
"더 이상 도망갈 수 없구나!! 삶의 비극과 괴로움으로부터!! 슬픈 현실을 마주함으로부터!! "
나쁜 것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건강검진을 극구 피해왔고,
아는 의사가 그렇게 권하는데도 부인과 암검진을 45살이 되도록 한번도 받지 않았던 내게 닥친 일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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